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 (문단 편집) == 갈팡질팡 정치판 == 이 상황에서 [[여당]]인 [[민주자유당]]은 우왕좌왕했다. [[민주당(1991년)|민주당]]은 국회를 열자고 했고 민자당은 이를 정치 공세로 일축했다. 5월 1일에 민주당은 의총 성명에서 "과거 [[군사독재|군사정권]]마저도 이보다 훨씬 작은 사고에도 즉각 국회를 소집했었다"면서 "국정 조사만으로 대구 문제를 마무리하자는 민자당의 주장은 국회 문을 아예 닫자는 것"이라 주장했다. 민자당 사무총장인 [[김덕룡]]이 "야당이 이번 사고를 정략적으로 이용하고 있다"고 비난하자, 민주당 총재 [[이기택]]은 "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느냐"며 "김 총장이 요즘 이상해졌다"고 개탄했다. 다음날인 5월 2일 [[김영삼]] 대통령은 민자당 초/재선 의원들을 [[청와대]]로 초청한 뒤 오찬 자리에서 "대구 사고는 몇 사람의 무책임한 짓 때문에 아까운 많은 희생자를 냈다. '''정부도 공동의 피해자다'''"라고 주장했다. 또 그는 "[[미국]]에서는 아직도 76명의 실종자를 찾지 못하고 있는데[* 같은 시기에 발생한 [[오클라호마 폭탄 테러]]를 가리킨다.] '''우리나라 같으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. 미국에서는 사고에도 불구하고 정부를 비난하기는커녕 오히려 [[빌 클린턴|클린턴]]의 인기가 올라가더라'''"고 망언을 했다.[* 김영삼은 2달 뒤 [[삼풍백화점 붕괴 사고]] 때도 대국민 담화 후 "'''이카면 되겠제"'''라는 실언을 [[https://youtu.be/3EUXAbwxUAs?t=2507|남겼다.]]] 이 발언에 대해 [[서강대학교]] 교수 박호성은 5월 25일자 [[주간조선]]에서 "누군가는 지금 우리의 김 대통령을 '무면허 운전사'에 빗댄다. 그리고 이른바 [[문민정부|문민 체제]]를 '뺑소니 차량'과 견주기도 한다"고 하여 정부도 피해자로 인식하는 김영삼의 상황 인식이 스스로 [[무정부 상태]]를 자초해낼 수 있는 위험한 발상이라고 규정했다. 그리고 수사까지 부실했다. 대구의 시민단체들은 축소 수사에 거세게 반발했으며 5월 2일에 대구 내 40여 개 시민단체들은 일제히 항의 성명을 발표했고, [[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|한총련]] 산하 대경총련 소속 대학생 1,500여 명은 '허구적인 세계화 논리 분쇄와 사고정권 퇴진을 위한 결의대회'를 열기까지 했다. 또 당시 보수 언론들은 친여적일 망정 그래도 독자들이 지켜보는 눈이 있어서인지 정말 너무한다 싶으면 정부 여당까지 비판하기도 했는데 참사 당시 민자당의 태도가 그런 경우에 속했다. 당시의 언론들은 민자당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. [[조선일보]] 5월 2일자 사설 [[https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aver?articleId=1995050200239103003&editNo=1&printCount=1&publishDate=1995-05-02&officeId=00023&pageNo=3&printNo=23016&publishType=00010|<비전문가 판치는 세상>]]에서는 당시 [[한국가스안전공사]]의 임원 중 임종순 사장을 비롯한 4명이 청와대나 민자당 출신이고 오직 기술이사 한 명만 본사 부장을 지낸 사람이라고 비판했다. 그리고 [[경향신문]] 5월 3일자 역시 기사 제목 그대로 [[http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hn?articleId=1995050300329105005&editNo=20&printCount=1&publishDate=1995-05-03&officeId=00032&pageNo=5&printNo=15414&publishType=00010|<소 잃고 외양간도 안 고친다>]]고 비판했는데 [[아현동 도시가스 폭발 사고|아현동 사태]] 당시의 대책이 재탕되어 발표된 것일 뿐이다. 그리고 같은 날 조선일보도 사설 <[[https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aver?articleId=1995050300239103005&editNo=1&printCount=1&publishDate=1995-05-03&officeId=00023&pageNo=3&printNo=23017&publishType=00010|민자당 도망가기]]>에서는 "민자당의 태도가 해괴하고 고약하다"고 하여 "사람이 2백명씩이나 죽임을 당하거나 중상을 입었는데 그것을 국회에서 논의하자는 것을 이 핑계 저 구실로 막으니, '''국회는 대체 무엇 하는 곳이며 집권당인 민자당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.'''"라고 말했다. 또 [[중앙일보]] 5월 4일자 사설 [[http://www.joongang.co.kr/article/3059032|<문제있는 여권의 현실인식>]]에선 "우리는 이미 그저께 왜 이 사고를 국회에서 다루지 못하느냐고 지적한 바 있지만 여당은 며칠씩이나 국회를 공전시키면서까지 이 사고를 회피하고 있다."고 지적했다. 동아일보는 다음날 사설 [[http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hn?articleId=1995050500209103005&editNo=45&printCount=1&publishDate=1995-05-05&officeId=00020&pageNo=3&printNo=22845&publishType=00010|<대국 못 보는 집권 여당>]]에서도 비슷한 비판을 했다. 심지어 [[국민일보]] 5월 10일자 <김진규 칼럼> [[http://news.kmib.co.kr/article/viewDetail.asp?newsClusterNo=01100201.19950509000000501|'정부/여당의 잇단 악수']]에서 '여당의 한심한 국회 대응'을 지적하며 "2백여 명의 무고한 시민이 죽고 다쳤는데도 '뒤에 국조권 발동...' 운운하며 야당에게 대정부 질의조차 못하게 가로막는 등 임시국회를 공전하는 건 국민을 깔보는 처사"로 간주했다. 결국 이 참사와 [[문민정부]]가 [[부울경|PK]]에만 신경쓰고 [[대경권|TK]]를 홀대한다는 여론에 의해[* 이 당시 문민정부의 주류는 [[상도동계]]였고 [[김덕룡]] 등 극히 일부를 빼고는 대부분 PK 출신이었다. 반대로 졸지에 비주류가 된 [[민정계]]는 TK 출신이 많았다. 문민정부는 민정계를 권력의 외곽으로 밀어내는 작업을 본격화했고 TK 출신 의원들도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. 결국 TK 출신 의원 일부가 [[김종필]]의 [[자유민주연합]]으로 합류하게 되는데 충청권 지역 정당이었던 자민련이 [[TK 자민련|TK에서 의외의 선전을 할 수 있었던 배경]]이 여기에 있다.] 그 해 6월 치뤄진 [[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]]에서 [[민주자유당]]의 [[조해녕]] 후보는 '''4위'''로 낙선했고[* 보수 정당이 텃밭 중의 텃밭이라고 할 수 있는 [[대구광역시]]에서 이 정도로 참패한 사례는 전무후무하다.] [[무소속]] [[문희갑]] 후보가 [[대구광역시장]]으로 당선되었다. 또한 이듬해 열린 [[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]]에서도 [[대구광역시]]에서는 [[신한국당]]은 2석밖에 건지지 못했으며[* 그마저도 [[서구 을(대구)|서구 을]] [[강재섭]]은 표 분산으로 30%대 득표율로 당선됐다.] [[자유민주연합]]이 압승을 거두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